2008년 1월 22일 화요일

레모니 스니켓 위험한 대결

1권을 읽는데 15분이 채 안 걸린 듯 하다. 굵은 책을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매우 만족할만한 분량이다. 최근 들어 더더욱 느끼는 것이지만, 장편 소설을 쓰고 싶더라도 반듯이 읽기 편할 분량으로 잘라서 출판하며, 싸게 판다면 더욱 효과적일 것 같다. 나 같은 사람은 도무지 굵은 책을 읽으려면 너무나 힘들다. 읽기 불편하기 보다 읽다 지쳐서, 아예 열어보질 않게 된다. ‘생각의 속도가 빨라져서 그런가짧은 책을 여러 권 읽는 것이 훨씬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각설하고, 레모니 스니켓을 추천한 사람은 우석훈씨이다. 그의 최근 나온 책들과 연결해서 읽어본다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어렴풋하게 나마 하고 있었다. 책은 현재 영문판 13권이 최종본으로 나와 있고, 번역은 5권까지 되어 있다고 한다. 지금 편집하고 있는 책에서 한 대학교 1학년 학생이 이런 말을 한다.

 

사실 난 희망이란 걸 느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이것에 대한 설명으로 참 어려운 일을 겪으셨군요라고 이해하는 것과는 다른 방향이다. 레모니 스니켓의 바이올렛과 클로스, 그리고 서니에게 던질 수 있는 말과는 조금 다른 성격임을 보여준다. 세 남매는 (현재 2권을 읽고 있지만) 끊임없이 불행한 이야기들로 13권의 책을 채워 나가겠지만, 이들은 희망을 전제한 채로 불행을 맛보고, 희망이 조금씩 깨져나가는 것이다. 이미 희망을 품고 사는 아이들이다. 그들 보다 조금 더 자란 20살 대학생은 세 남매가 겪은 힘든 사연을 바탕으로 희망을 느껴본 적이 없다는 세상 한탄을 하는 것이 아니다. 나는 희망이란 것을 심각하게 고민해 봐야 할 정도의 절망적 상황을 느낀 적이 없기에, 도전과 반성 정도의 긍정적인 변화를 꿈꾼 적은 있지만 희망이라는 목적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이야기한다.

 

 

 

우석훈씨가 읽어보라고 했던 맥락은 위와 같은 것이었을까? 절망의 경험 없이 매우 나이브한 인생을 살아온 우리가 레모니 스니켓의 책이라도 읽고 심각하게 생각해 보라는 것인가? 아니면 정말로 절망의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못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조금씩 궁금해 지긴 한다. 하지만 분명히 앞의 대학교 1학년 학생의 희망에 대한 생각과 세 남매의 희망에 대한 생각은 분명 좀 다른 것으로 이해 된다. 그리고 13권까지 세 남매의 희망이 어디까지 부셔질지 조금 걱정이 되기도 한다. 픽션이긴 하지만……



 

그리고 이 책은 어쩌면 매 앞에 나온 서문이 실마리가 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나의 비어트리스! 내 사랑, 내 그리움, 이제 다시는 볼 수 없는....내 사랑, 내 그리움, 땅속에 고이 잠든...... For beatrice - My love for you shall live forever, You, however, did not.
링크 되어 있는 곳은 학습 생태계에서 하는 "밑줄 긋기" 라는 것인데, 책과 관련된 좋은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기반이 될듯하다. 비어트리스는 독어로 읽으면 베아트리체라고 읽을 텐데, 이는 그 유명한 단테의 베아트리체가 아닌가? 약간은 심리학적인 아집이지만, 그가 어떤 사진 속에도 얼굴을 잘 드러내지 않는 괴짜 작가라고 쓰여 있는데, 사실 이 모든 이야기는 그 베이트리체로 부터 경험한 사실을 바탕으로 썼을지 모른다. '죽음으로 부터의 회기'를 이야기하는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자면, 죽음은 삶을 실존적으로 느끼게 하는 가장 큰 경험인지 모르겠다. 나는 죽음을 옆에서 지켜 보면서, 가장 큰 삶을 느꼈는데, 레모니 스니켓이 사랑하는 사람을 읽고 괴짜가 된 것이라면 그의 이야기를 쭈욱 읽어볼만 할 듯하다. 읽는 내내 그렇게 우울하거나 절망적이진 않았는데, 적어도 10권까지 읽을 용기는 생기지 않을까? 원래 호러와 서스펜서를 좋아해서 1권의 절망은 그러저러 하다.


 

집중을 한 나머지 잠이 불규칙 적이다. 자고 싶을 때는 잠이 오지 않고, 자기 싫을 때는 잠에 들어버렸다가 아무도 깨어있지 않는 새벽 3시쯤 일어나게 된다. 휴우.. 또 눈이 내리네,,, 오늘 블로그를 편집하면서, 새로운 맛을 알게 되는 듯 하다. 블로그는 어떤 점에서 글의 퇴고 방식을 배우는 공간으로 느껴진다. 한번 잘 써서 보여주는 것 보다는 계속 완성되어 가는 글을 만들 수 있는 좋은 도구라고 느껴진다. 이런 글과 블로깅이 모두들 절망적으로 느끼는 상황 속에서 혼자 유유자적 희망적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하는 방법이 되길 바란다.

2008년 1월 16일 수요일

네이버는 어찌 될까?

IT Contets 시장의 광고에 대한 개념을 티비와 같은 방식으로 변화 시킨다면, 국내에서 선점하고 있는 네이버는 자신의 광고주들을 계속 유지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양질의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검색엔진으로서는 매우 힘든 길을 걷게 될 것 같다. 네이버의 향방 뿐만 아니라 네이버를 바라보는 시각이 중요한 이유는 광고주들의 선택에 따라서 포탈의 향방 또한 결정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중국으로 진출해서, 수익 구조를 각 나라의 지역민에게 나누어준다는 점에서는 참으로 괄목할 만 하다. 춘천 네이버 알바 단지에서 “Lavor”를 키우고 있으며, 일본에서도 일본인들을 직접 고용하며, 중국에서 또한 그런 방식으로 회사를 불려 나가고 있다고 전해 들었다. 이것은 오토메틱을 구현해야 한다는 기본적인 철학과 완전히 반대로 나가는 정책이다. 구글은 이런 정책을 구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하지만 양극단을 모두 이해할 필요가 있다.


검색엔진은 오토메틱을 구현해야한다면?


구글은 전세계 1억명 이상의 사용자들의 60%이상이 선호하는 검색엔진이다. 하지만 구글이 로컬 국가들의 웹환경의 진보를 위해 도움을 주는 방향의 로컬 정책을 세우지 않는다면, 그것은 글로벌 기업들의 수익올리기와 별반 다름없는 정책이고, 오토메틱이란 정책을 위해 로컬국가를 죽이는 것은 생태학적으로 좋지 않다.


검색엔진은 알바를 이용해서라도 양질의 정보를 제공한다. 즉 오토메틱일 필요가 없다?


네이버는 대신 수천명의 학생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한다. 그리고 이런 로컬 정책은 장기적으로 로컬 국가의 생태계를 이롭게 만든다. 오토메틱을 구현하는 것의 일장일단은 사람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존재하지 않고도, 불편하지 않는 현실을 구현하는 것은 IT의 당연한 과정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새롭게 구현된 핸드폰 기능이 불편해서 쓰지 않는 것 처럼 오토메틱의 기능이 항상 한 국가에 있어서 옳다고는 할 수 없다.


인터넷 대부인 분에게 들은 얘기다. 구글이 더욱 성장하기 위해서도, 아마 경쟁자가 필요할 것이고, 그 경쟁자는 인터넷 1억명중에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는 중국,일본 시장에서 나와야 할것이라고 했다. 그의 예언이 맞아 떨어지는 구도는, 현재의 네이버도 잘하고, 바이두도 잘하고, 일본의 야후도 잘해서 세 회사가 하나의 공동 컨센서스를 갖고 연구진을 공유하는 것이다. IT업체의 사람들은 인문학을 하는 사람보다 훨씬 공유 개념이 강한 세상이니깐,,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다시 네이버는?


 Localization의 선도 그룹으로서 천천히 동아시아의 Naver로 커가길 바라는 입장에서, 분명히 다. 한국에서 집권당의 이익을 대변하는 포탈 언론처럼 보이는 현상을 만드는 대중조작의 누명을 암암리에 듣게 될 것이며, 그 사실은 중국이나, 일본이나 마찬가지 일 것이다. 만일 사람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이는 중국에서 Naver가 한국과 비슷한 위치의 성장을 하게 된다면, 어쩌면 중국 공산당의 정치적 입장을 대변해 주는 Naver가 될지 모른다. 어쩌면, 닫혀진 폐쇄적인 성격은 오히려 더 맞아 떨어져 이익을 창출할 가능성도 있다.

 

 

좀 더 넓은 시각을 가진 Naver로서 충분히 다른 시장을 노릴 수 있는 변화를 꾀하거나, 올바른 철학을 구축하는 큰 회사로 발돋움 해 구글에 뒤지지 않는 국내 기업이 되길 바란다.

 

 

 

단순한 다음 죽돌이로서, 거나 대로 하지 에서 의에 해야 다.

2008년 1월 11일 금요일

[Analog] 아날로그인가? 디지털이다 [책읽기 미션]

디지털이다.

 

디지털 세상임을 누구보다도 자명하는 듯한 제목의 네그로폰테 교수의 책을 가벼이 아날로그의 반대되는 디지털로 이해하면 가장 큰 함정에 빠진다. 왜냐면 그는 이론가이기 전에 행동적 연구가이며, 자신이 겪어온 디지털 문명의 변화 양상을 가장 아날로그적으로 풀어 내려고 했다. 그는 한국판 서문과 자신의 서문에서 그런 점들을 엿볼 수 있다. 교육철학에 대한 확고함[1]과 앞 세대를 배려하기 위해 책을 썼고, 자신의 글을 읽어주는 독자를 고려했으며, 더 많은 상상의 여지를 남기기 위해 책이라는 개체를 신중하게 선택했다.

 

 그는 디지털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지만 사실 그 디지털 세상의 방향성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기계적이거나 논리적인 방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찾고자 했던 아날로그적 세계관과의 접점을 다시 설명하는 것이다. 즉 단순히 디지털이다이라고 천명하지만 그의 말속에는 우리가 찾고자 하는 아날로그적 모습들과 디지털적인 모습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두 가지 방향을 나누어 책을 다시 읽어본다.

 


 

국내 IT업계 혹은 개발의 우두머리를 자처하는 정부가 가장 착각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빠른 회선 망의 구축이다. 하지만 그가 이야기하듯, 획기적인 압축방식을 개발하는 것은 현재의 회선 망으로도 효율성을 높이는 기회일지 모른다. 모두들 더 넓은 도로와 더 많은 사람들이 놀 수 있는 광장을 만드는 것은 어쩌면 개별화된 디지털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좀 더 압축되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개발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두 번 째는 아톰과 비트로 자명하게 구분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인데, 이를 확장해 아날로그의 방식에서 나오는 사고관 자체를 비판한다. 디지털의 탄력성과 많은 정보를 비트의 흐름에 넣어 전달할 수 있음을 자명하게 보여준다.

 

상호 교차되는 소유권과 미디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Creative Commons 나 오마이 뉴스 같은 형태의 미디어를 보면 이미 현실화된 이야기다. CC의 방식이나 Copyleft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경제학 패러다임이 나오기 시작하고, 오마이 뉴스의 오연호 대표가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은 이와 같은 흐름상에서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인터페이스는 이미 구현되어 나타나고 있다. 특히나 인터페이스 부분에서 인간은 아날로그라는 구세대적 가치에 편함을 느낀다고 여긴다면, 원래 익숙한 방식의 인터페이스에 적응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즉 인터페이스는 특히나 아날로그의 적용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는 15년 전쯤에 활발히 변화하던 순간을 포착하고, 미래를 읽으려고 노력했다. 이미 그가 예견한 부분은 대부분이 그가 예견한 방향대로 진행되어 간다는 부분에서 비판할 부분을 많이 찾기 어려울 수 있다. 정보를 독점했던 MS와 그것을 판단할 수 없었던 컴퓨터 사용자들은 대부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창조적 공간을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만들어갔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유, 열림, Open Source, 창조적 공유재 같은 대상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Linux Google같은 회사들이 현재 이 시기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례들이다.




 

하지만 아날로그식이라는 사고관을 이야기 함에 있어서 그는 괴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듯하다. 아날로그식의 아톰은 지극히 비트를 따라올 것이 못된 다는 것과 아날로그 식의 사고는 융통성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반대로 인터페이스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이어령 선생님이 보여준 디지로그와 비슷한 사고를 보여주는데, 이는 어쩌면 좀더 아날로그 방식 그 이전의 기계의 손때가 닫지 않은 인간성에 대한 방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찾고 싶은 것 또한 아날로그 방식의 라디오가 아닌 아날로그 방식의 라디오를 사용할 때의 느끼던 인간적 감수성이기 때문이다. 만약 네그로폰테 교수가 이야기하는 방향이 이런 인간적 감수성을 계속 상실하게끔 하는 삶을 의도적, 비의도적으로 연출한다면, 그는 세기의 예언자에서 새로운 세기의 망언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사실 비의도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항상 고찰하면서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공부할 방향으로 잡고 있는 오감에 대한 탐구, 의식주에 대한 정리를 하게 될텐데, 그의 책 중에서 가장 빈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것을 바탕으로 그의 책의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가진 디지털 이야기를 우리가 더 채워 넣을 수 있다. 행동을 촉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는 디지털만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디지털의 방향성은 결국 아날로그를 역으로 거슬러 그 이전의 인간성에 대한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옆에는 항상 아이팟 터치를 함께 들고 책을 읽었다. 그가 얘기하는 과거의 이야기들은 지금 현실이 되었으며, 그것의 결정체 중에 하나가 아이팟 터치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의 협업과 공동체적 지성이 없다면, 이런 삶을 바꿔줄 수 있는 제품은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가장 글로컬적인 사고, 마케팅의 시작일지 모른다.



[1]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의 교육 분야는 극히 위험한 길을 걷고 있다고 비판함.

2008년 1월 9일 수요일

강화도를 다녀와서

작은 행사든 큰 행사이든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연출하는지는 그 행사의 모든 인상을 결정하는 듯 하다. 4 5일 동안의 짧은 여행이었는데, 하루의 마지막 장면들 하나하나를 잘 조합해 보면 제 1회 10 시민기자 학교에 대한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지는 듯 하다.

 

 

 

이 곳에 굳이 올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온 이유가 조금씩 궁금해 지기 시작한다. 사람? 기자? 대안교육? 학습 생태계? 정말 도무지 정확한 이유가 잡히지 않는 여정이다. 내가 선택하지만, 처음부터 정해지지 않은 일들만을 맡아서 하는 모습은 일부러 무엇인가 피하고 있는 자신이 느껴진다. 난 뭘 찾아 조금은 익숙한 고장인 강화도를 찾아왔던 걸까?

 

 

 

Catch Scope 팀에서 찍은 덕하리 영상을 보고 있자니, 덕하리의 현실은 비단 덕하리의 현실만이 아닌 듯 하다. 우리는 그냥 동떨어진 채로 계속 불편하게 흩어진 상처들 편(뿡)”만을 느끼며 그 상처를 인식 못한 채 살아갈 것인가? 라는 내 삶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런 내 삶속에서 생겨난 삶의 파편들을 버리고 갈 것인지, 회복하기 위한 삶을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젊은 이들은 매우 커다란 이상을 가지고, 고향을 떠났을지 모른다. 도시에 나가서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을 돈을 많이 벌어서, 호강 시켜 드려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갖고 살 것이다. 그 의무감은 점차 자신의 생각보다 너무 짊어지기 어려운 짐이 되 버리고, 이 얘기한 불편하게 흩어진 상처들의 파편가 되어 버린게 아닐까? 마을 안에서 생겨나는 상처들은 분명 그 구성원 한명의 삶으로 부터, 한 가족의 세대간에 만들어진 상처부터 출발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덕하리의 현실은 내 삶과도 닮아 있었다. 다른 장면의 나를 본다면 어색해 할만한 당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강화도로 가기 전까지 끊임없이 찾고 싶었던 것은 아마 내 삶에 대한 고민의 한 축이었을지 모른다.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정리한 이상, 그 일들이 작은 단위를 이루고 있는 내 삶의 조각들의 상처부터 치료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여태까지 해 왔던 것들은 내 삶의 상처들의 파편을 주워 담기 위한 방법들이었다. 괜히 다른 훌륭한 것들처럼 포장할 수도 있지만, 조용히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었다. 강화도를 다녀와서 하며 조각들의 조립 순서를 깨닫게 된 것은 아니지만, 대학교 마지막을 마칠 때까지 힘을 내며 움직일만한 방법들을 찾아 볼 기회가 생겼다. 놓치지 않고, 천천히 심호흡하며 그 기회를 잡아봐야겠다. 적어도 흩어진 파편을 정리할 수 있는 보물지도를 찾았으니까…..

2008년 1월 2일 수요일

여성으로서 겪는 한국의 일상적 파시즘


 
여성이 우리나라에서 겪게 되는 일상적 파시즘의 모습은 잡지 속 한 장면의 광고처럼 단편적이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자시의 가치관을 결정하는 20대까지, 발달하는 가족과 사회와 경험집단의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여성관을 결정한다. 그 여성은 우리 주변의 친구, 여동생, 누나들일 수도 있다. 그런 가정을 기본으로 P라는 짧은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



  P
는 대학에 오자마자, , , 동아리 집단들이 남성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친구들은 문대라서 다른 곳 보다 더 열려 있고, 다 이해해 주겠다는데 왜 친해지려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지만 그 집단에 소속되길 거부한다. 대신 수업에서 만난 한 남성과 연애를 하게 되는데, 그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남자의 익숙한 방식으로 연애하길 싫어한다. 남자친구는 이런 P가 답답하기만 하며, 좋아하는데 연애의 방식을 고민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남자친구는 좋아하면 정해진 연애의 방법이 있다고 항상 이야기한다. P는 한편으로 학교에 팽배해 있는 남성 우월주의를 해결해보고자 여성주의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P의 친구인 Q는 여성주의 운동을 하는 P를 답답해하고, 드센 여자친구로 생각한다. 남성 중심의 사회란 것은 Q또한 인식하고 있지만, 요리저리 피하며 현재 스튜어디스의 꿈을 이루고 있다. 자신의 꿈을 이루면 되지, 여성주의운동 같은 드세고, 남성에게 폭력적으로 비춰지는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삶을 꿈꿀 뿐이다. 2006 Q는 다양한 입사조건을 채운 후에 스튜어디스만큼 대우와 연봉을 준다던 철도 승무원에 지원했다. 그녀는 곧 KTX 승무원이 되었고, 부당한 대우와 조처에 대해 거부하기 시작했으며, 광화문에서 시위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나가는 사람들 또한 ‘그냥 조용히 살아야지’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며 혀를 차고 있다.



   P는 과, , 동아리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거대한 집단의 의식과 부딪힌다. 집단 속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그 집단이 소유하고 있는 공간을 쓰기 위해서는 밤새 술을 잘 먹는, 오래 밤새서 놀 수 있는, 기분이 나빠도 집단의 사람들을 만나면 웃으며 인사하는 자세를 P에게 요구한다. P가 어떤 이유와 차별을 느껴서, 그 공간을 멀리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으며, , , 동아리의 유지와 역사성을 쌓아가는 일이 가장 최우선이다. P가 그 공간에 나오지 않는 사실은 다수의 사람에게 불편한 사실이 되어버리고, 집단에서 스스로 나간, 낙인찍힌 존재로 생각할 뿐이다. P의 느낌과 생각은 이야기 할 자리도 없어졌고, P의 불편한 진실은 집단의 불편한 시선으로 바뀐다.




  P
의 남자친구는 남성이 여성을 돌봐주는 연애구도를 강요한다. 여자이기 때문에,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남성은 여성을 챙겨줘야 하며, 그런 챙김을 받아들이지 않는 P를 보면 답답할 뿐이다. 친구들의 얘기를 듣고, 이런 방식 저런 방식으로 P를 사랑해 주고 싶어 하지만,그가 남성으로서 P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매우 일상화 되어 있는 연애방식에 관한 파시즘이다. 연애에 있어서,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적은 사람을 더 챙기고, 선물해줘야 하며, 동성 간의 연애는 징그러운 것이 되며, 연애를 하지 않으면 불쌍한 것이라고 느끼는 것은 일상의 폭력이다. 이 폭력 자체가 비뚤어진 생각으로부터 만들어진 집단 사고라는 사실을 간과하며 다양한 매체의 사례들을 보며 웃으며, 잘못됐다고 인식하면서도, 대중들은 계속해서 이런 연애 방식이 익숙하고, 편하다고 생각하는 거대한 일상적 파시즘을 생산해 낸다.




  P
Q라는 대상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같은 여성으로서의 일상속의 폭력을 경험한다. P Q와 같은 여성들이 겪을 수 있는 일상적 폭력과 그것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일상적 파시즘을 비판하는데도, Q는 그것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드센 여자애’, ‘이상적인 행동주의 자’ 정도로 결론을 내려버린다. 이런 많은 Q들의 여성 자신에 대한 시선이 모여, 여성을 여성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소외집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기현상을 만들어 낸다. Q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사회적 권력을 높이고자 하는 집단에 대해 파시즘적으로 몰아 새운다. 여성이 여성주의 운동을 깔보는 시선 자체가 매우 일상화 되어 감각조차 없음을 금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빠른 적응이, 소위 우수한 인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대체 되어 Q P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Q는 시위를 하는 과정에서 뼈저리게 P를 그리워할지 모른다. 어쩌면 비슷한 일상적 폭력의 구도를 취업 하고 나서야 느꼈기 때문이다. 시위를 하고 있는 Q모습을 빨갱이, 혹은 사회구조를 뒤집으려는 철없는 시위집단 정도로 사람들은 생각하며 지나가는 모습은 사회운동과 여성문제에 대해 좀 더 크게 형성된 일상적 폭력이다. 굳이 얘기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며, ‘이 나라에서 얘기해서 뭐하냐?’는 방식의 사고는 열심히 시위를 하고 있는 Q라는 여성의 권리를 다시 한 번 죽이게 된다.




 
여성을 통해 생겨날 수 있는 일상적 파시즘의 모습은 일상적 폭력 현장과 연결되어 구분하기 힘든 상황을 연출한다. 무엇이 일상적 폭력이며, 무엇이 일상적 파시즘인지 그 경계 또한 확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분명히, 폭력적인 경험과 그것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남성, 여성, 사회구성원의 행동과 시선, 말투는 일상적 파시즘을 계속해서 생성하며, 전파해나간다. 그리고 그 일상적 파시즘의 연결고리는 그네들의 성장기와 아주 잘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분명 쉽게 해결되기 어려워 보인다. 여성에 대한 일상적 파시즘의 만연은 앞으로 나의 동생, 누나, 후배, 선배, 엄마, 배우자에게 또한 적용된다는 사실을 가정해 본다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일상적 파시스트가 되어가는 무의식적 사고는 피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