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1월 11일 금요일

[Analog] 아날로그인가? 디지털이다 [책읽기 미션]

디지털이다.

 

디지털 세상임을 누구보다도 자명하는 듯한 제목의 네그로폰테 교수의 책을 가벼이 아날로그의 반대되는 디지털로 이해하면 가장 큰 함정에 빠진다. 왜냐면 그는 이론가이기 전에 행동적 연구가이며, 자신이 겪어온 디지털 문명의 변화 양상을 가장 아날로그적으로 풀어 내려고 했다. 그는 한국판 서문과 자신의 서문에서 그런 점들을 엿볼 수 있다. 교육철학에 대한 확고함[1]과 앞 세대를 배려하기 위해 책을 썼고, 자신의 글을 읽어주는 독자를 고려했으며, 더 많은 상상의 여지를 남기기 위해 책이라는 개체를 신중하게 선택했다.

 

 그는 디지털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늘어 놓지만 사실 그 디지털 세상의 방향성에 대해서 자세히 살펴보면, 그것은 기계적이거나 논리적인 방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찾고자 했던 아날로그적 세계관과의 접점을 다시 설명하는 것이다. 즉 단순히 디지털이다이라고 천명하지만 그의 말속에는 우리가 찾고자 하는 아날로그적 모습들과 디지털적인 모습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두 가지 방향을 나누어 책을 다시 읽어본다.

 


 

국내 IT업계 혹은 개발의 우두머리를 자처하는 정부가 가장 착각하고 있는 것 중에 하나는 빠른 회선 망의 구축이다. 하지만 그가 이야기하듯, 획기적인 압축방식을 개발하는 것은 현재의 회선 망으로도 효율성을 높이는 기회일지 모른다. 모두들 더 넓은 도로와 더 많은 사람들이 놀 수 있는 광장을 만드는 것은 어쩌면 개별화된 디지털을 잘 못 이해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좀 더 압축되어 효율성을 높일 수 있는 개발이 더욱 빛을 발할 것이라는 예상이다.

 

두 번 째는 아톰과 비트로 자명하게 구분되는 아날로그와 디지털인데, 이를 확장해 아날로그의 방식에서 나오는 사고관 자체를 비판한다. 디지털의 탄력성과 많은 정보를 비트의 흐름에 넣어 전달할 수 있음을 자명하게 보여준다.

 

상호 교차되는 소유권과 미디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만, 이것은 우리가 Creative Commons 나 오마이 뉴스 같은 형태의 미디어를 보면 이미 현실화된 이야기다. CC의 방식이나 Copyleft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경제학 패러다임이 나오기 시작하고, 오마이 뉴스의 오연호 대표가 전세계 언론의 주목을 받는 것은 이와 같은 흐름상에서이다.

 

그가 이야기하는 인터페이스는 이미 구현되어 나타나고 있다. 특히나 인터페이스 부분에서 인간은 아날로그라는 구세대적 가치에 편함을 느낀다고 여긴다면, 원래 익숙한 방식의 인터페이스에 적응하기 쉬워지는 것이다. 즉 인터페이스는 특히나 아날로그의 적용이 필요한 부분이다.

 

 

그는 15년 전쯤에 활발히 변화하던 순간을 포착하고, 미래를 읽으려고 노력했다. 이미 그가 예견한 부분은 대부분이 그가 예견한 방향대로 진행되어 간다는 부분에서 비판할 부분을 많이 찾기 어려울 수 있다. 정보를 독점했던 MS와 그것을 판단할 수 없었던 컴퓨터 사용자들은 대부분 시간이 흐름에 따라 창조적 공간을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해 만들어갔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공유, 열림, Open Source, 창조적 공유재 같은 대상들이 주목을 받기 시작한다. Linux Google같은 회사들이 현재 이 시기 세계의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은 쉽게 찾아볼 수 있는 사례들이다.




 

하지만 아날로그식이라는 사고관을 이야기 함에 있어서 그는 괴리적인 판단을 하고 있는 듯하다. 아날로그식의 아톰은 지극히 비트를 따라올 것이 못된 다는 것과 아날로그 식의 사고는 융통성이 없다는 것을 지적한다. 반대로 인터페이스와 커뮤니케이션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이어령 선생님이 보여준 디지로그와 비슷한 사고를 보여주는데, 이는 어쩌면 좀더 아날로그 방식 그 이전의 기계의 손때가 닫지 않은 인간성에 대한 방향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찾고 싶은 것 또한 아날로그 방식의 라디오가 아닌 아날로그 방식의 라디오를 사용할 때의 느끼던 인간적 감수성이기 때문이다. 만약 네그로폰테 교수가 이야기하는 방향이 이런 인간적 감수성을 계속 상실하게끔 하는 삶을 의도적, 비의도적으로 연출한다면, 그는 세기의 예언자에서 새로운 세기의 망언자가 될 수 있다. 우리는 사실 비의도적으로 생겨날 수 있는 무엇인가를 항상 고찰하면서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가 앞으로 공부할 방향으로 잡고 있는 오감에 대한 탐구, 의식주에 대한 정리를 하게 될텐데, 그의 책 중에서 가장 빈약한 부분이기도 하다. 이 것을 바탕으로 그의 책의 아날로그적 감수성을 가진 디지털 이야기를 우리가 더 채워 넣을 수 있다. 행동을 촉구하는 것은 아니지만, 분명 그는 디지털만을 이야기하지 않으며, 디지털의 방향성은 결국 아날로그를 역으로 거슬러 그 이전의 인간성에 대한 회복을 목적으로 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의 책을 읽으면서, 옆에는 항상 아이팟 터치를 함께 들고 책을 읽었다. 그가 얘기하는 과거의 이야기들은 지금 현실이 되었으며, 그것의 결정체 중에 하나가 아이팟 터치라고 생각했다. 많은 사람들의 협업과 공동체적 지성이 없다면, 이런 삶을 바꿔줄 수 있는 제품은 나오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것이 가장 글로컬적인 사고, 마케팅의 시작일지 모른다.



[1] 한국어판 서문에서 한국의 교육 분야는 극히 위험한 길을 걷고 있다고 비판함.

2008년 1월 9일 수요일

강화도를 다녀와서

작은 행사든 큰 행사이든 마지막 장면을 어떻게 연출하는지는 그 행사의 모든 인상을 결정하는 듯 하다. 4 5일 동안의 짧은 여행이었는데, 하루의 마지막 장면들 하나하나를 잘 조합해 보면 제 1회 10 시민기자 학교에 대한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지는 듯 하다.

 

 

 

이 곳에 굳이 올 이유가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온 이유가 조금씩 궁금해 지기 시작한다. 사람? 기자? 대안교육? 학습 생태계? 정말 도무지 정확한 이유가 잡히지 않는 여정이다. 내가 선택하지만, 처음부터 정해지지 않은 일들만을 맡아서 하는 모습은 일부러 무엇인가 피하고 있는 자신이 느껴진다. 난 뭘 찾아 조금은 익숙한 고장인 강화도를 찾아왔던 걸까?

 

 

 

Catch Scope 팀에서 찍은 덕하리 영상을 보고 있자니, 덕하리의 현실은 비단 덕하리의 현실만이 아닌 듯 하다. 우리는 그냥 동떨어진 채로 계속 불편하게 흩어진 상처들 편(뿡)”만을 느끼며 그 상처를 인식 못한 채 살아갈 것인가? 라는 내 삶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그런 내 삶속에서 생겨난 삶의 파편들을 버리고 갈 것인지, 회복하기 위한 삶을 살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젊은 이들은 매우 커다란 이상을 가지고, 고향을 떠났을지 모른다. 도시에 나가서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을 돈을 많이 벌어서, 호강 시켜 드려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갖고 살 것이다. 그 의무감은 점차 자신의 생각보다 너무 짊어지기 어려운 짐이 되 버리고, 이 얘기한 불편하게 흩어진 상처들의 파편가 되어 버린게 아닐까? 마을 안에서 생겨나는 상처들은 분명 그 구성원 한명의 삶으로 부터, 한 가족의 세대간에 만들어진 상처부터 출발했음은 부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랬기에 덕하리의 현실은 내 삶과도 닮아 있었다. 다른 장면의 나를 본다면 어색해 할만한 당신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강화도로 가기 전까지 끊임없이 찾고 싶었던 것은 아마 내 삶에 대한 고민의 한 축이었을지 모른다. 내가 즐겁게 할 수 있는 일들을 정리한 이상, 그 일들이 작은 단위를 이루고 있는 내 삶의 조각들의 상처부터 치료할 수 있는 것이었으면 좋겠다. 내가 여태까지 해 왔던 것들은 내 삶의 상처들의 파편을 주워 담기 위한 방법들이었다. 괜히 다른 훌륭한 것들처럼 포장할 수도 있지만, 조용히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었다. 강화도를 다녀와서 하며 조각들의 조립 순서를 깨닫게 된 것은 아니지만, 대학교 마지막을 마칠 때까지 힘을 내며 움직일만한 방법들을 찾아 볼 기회가 생겼다. 놓치지 않고, 천천히 심호흡하며 그 기회를 잡아봐야겠다. 적어도 흩어진 파편을 정리할 수 있는 보물지도를 찾았으니까…..

2008년 1월 2일 수요일

여성으로서 겪는 한국의 일상적 파시즘


 
여성이 우리나라에서 겪게 되는 일상적 파시즘의 모습은 잡지 속 한 장면의 광고처럼 단편적이지 않다. 어렸을 때부터 자시의 가치관을 결정하는 20대까지, 발달하는 가족과 사회와 경험집단의 환경에 영향을 받으며 자신의 여성관을 결정한다. 그 여성은 우리 주변의 친구, 여동생, 누나들일 수도 있다. 그런 가정을 기본으로 P라는 짧은 이야기를 만들어 보자.



  P
는 대학에 오자마자, , , 동아리 집단들이 남성 중심의 패러다임으로 돌아가는 것을 느꼈다. 친구들은 문대라서 다른 곳 보다 더 열려 있고, 다 이해해 주겠다는데 왜 친해지려 하지 않느냐고 반문하지만 그 집단에 소속되길 거부한다. 대신 수업에서 만난 한 남성과 연애를 하게 되는데, 그를 좋아하긴 하지만, 그 남자의 익숙한 방식으로 연애하길 싫어한다. 남자친구는 이런 P가 답답하기만 하며, 좋아하는데 연애의 방식을 고민해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남자친구는 좋아하면 정해진 연애의 방법이 있다고 항상 이야기한다. P는 한편으로 학교에 팽배해 있는 남성 우월주의를 해결해보고자 여성주의 운동에 뛰어들게 된다. P의 친구인 Q는 여성주의 운동을 하는 P를 답답해하고, 드센 여자친구로 생각한다. 남성 중심의 사회란 것은 Q또한 인식하고 있지만, 요리저리 피하며 현재 스튜어디스의 꿈을 이루고 있다. 자신의 꿈을 이루면 되지, 여성주의운동 같은 드세고, 남성에게 폭력적으로 비춰지는 일을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행복한 삶을 꿈꿀 뿐이다. 2006 Q는 다양한 입사조건을 채운 후에 스튜어디스만큼 대우와 연봉을 준다던 철도 승무원에 지원했다. 그녀는 곧 KTX 승무원이 되었고, 부당한 대우와 조처에 대해 거부하기 시작했으며, 광화문에서 시위하는 자신의 모습을 지나가는 사람들 또한 ‘그냥 조용히 살아야지’하는 시선으로 쳐다보며 혀를 차고 있다.



   P는 과, , 동아리 활동을 시작하게 되면서 거대한 집단의 의식과 부딪힌다. 집단 속에서 관계를 맺으면서, 그 집단이 소유하고 있는 공간을 쓰기 위해서는 밤새 술을 잘 먹는, 오래 밤새서 놀 수 있는, 기분이 나빠도 집단의 사람들을 만나면 웃으며 인사하는 자세를 P에게 요구한다. P가 어떤 이유와 차별을 느껴서, 그 공간을 멀리하느냐는 중요하지 않으며, , , 동아리의 유지와 역사성을 쌓아가는 일이 가장 최우선이다. P가 그 공간에 나오지 않는 사실은 다수의 사람에게 불편한 사실이 되어버리고, 집단에서 스스로 나간, 낙인찍힌 존재로 생각할 뿐이다. P의 느낌과 생각은 이야기 할 자리도 없어졌고, P의 불편한 진실은 집단의 불편한 시선으로 바뀐다.




  P
의 남자친구는 남성이 여성을 돌봐주는 연애구도를 강요한다. 여자이기 때문에, 약한 존재이기 때문에 남성은 여성을 챙겨줘야 하며, 그런 챙김을 받아들이지 않는 P를 보면 답답할 뿐이다. 친구들의 얘기를 듣고, 이런 방식 저런 방식으로 P를 사랑해 주고 싶어 하지만,그가 남성으로서 P의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매우 일상화 되어 있는 연애방식에 관한 파시즘이다. 연애에 있어서, 나이 많은 사람이 나이 적은 사람을 더 챙기고, 선물해줘야 하며, 동성 간의 연애는 징그러운 것이 되며, 연애를 하지 않으면 불쌍한 것이라고 느끼는 것은 일상의 폭력이다. 이 폭력 자체가 비뚤어진 생각으로부터 만들어진 집단 사고라는 사실을 간과하며 다양한 매체의 사례들을 보며 웃으며, 잘못됐다고 인식하면서도, 대중들은 계속해서 이런 연애 방식이 익숙하고, 편하다고 생각하는 거대한 일상적 파시즘을 생산해 낸다.




  P
Q라는 대상을 통해서, 다시 한 번 같은 여성으로서의 일상속의 폭력을 경험한다. P Q와 같은 여성들이 겪을 수 있는 일상적 폭력과 그것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일상적 파시즘을 비판하는데도, Q는 그것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드센 여자애’, ‘이상적인 행동주의 자’ 정도로 결론을 내려버린다. 이런 많은 Q들의 여성 자신에 대한 시선이 모여, 여성을 여성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소외집단으로 만들어 버리는 기현상을 만들어 낸다. Q는 여성임에도 불구하고, 여성의 사회적 권력을 높이고자 하는 집단에 대해 파시즘적으로 몰아 새운다. 여성이 여성주의 운동을 깔보는 시선 자체가 매우 일상화 되어 감각조차 없음을 금새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남성 중심적인 사회에 대한 빠른 적응이, 소위 우수한 인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으로 대체 되어 Q P를 바라보는 시선 속에 나타난다.




 
마지막으로 Q는 시위를 하는 과정에서 뼈저리게 P를 그리워할지 모른다. 어쩌면 비슷한 일상적 폭력의 구도를 취업 하고 나서야 느꼈기 때문이다. 시위를 하고 있는 Q모습을 빨갱이, 혹은 사회구조를 뒤집으려는 철없는 시위집단 정도로 사람들은 생각하며 지나가는 모습은 사회운동과 여성문제에 대해 좀 더 크게 형성된 일상적 폭력이다. 굳이 얘기할 필요도 느끼지 못하며, ‘이 나라에서 얘기해서 뭐하냐?’는 방식의 사고는 열심히 시위를 하고 있는 Q라는 여성의 권리를 다시 한 번 죽이게 된다.




 
여성을 통해 생겨날 수 있는 일상적 파시즘의 모습은 일상적 폭력 현장과 연결되어 구분하기 힘든 상황을 연출한다. 무엇이 일상적 폭력이며, 무엇이 일상적 파시즘인지 그 경계 또한 확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분명히, 폭력적인 경험과 그것 자체를 느끼지 못하는 남성, 여성, 사회구성원의 행동과 시선, 말투는 일상적 파시즘을 계속해서 생성하며, 전파해나간다. 그리고 그 일상적 파시즘의 연결고리는 그네들의 성장기와 아주 잘 연결되어 있다는 점에서 분명 쉽게 해결되기 어려워 보인다. 여성에 대한 일상적 파시즘의 만연은 앞으로 나의 동생, 누나, 후배, 선배, 엄마, 배우자에게 또한 적용된다는 사실을 가정해 본다면, 우리는 의식하지 못한 채 일상적 파시스트가 되어가는 무의식적 사고는 피해야 한다.

 


2007년 12월 31일 월요일

Blue & Rosso

"냉정과 열정 사이"



팀 작업으로 글을 쓰고 있지만, 남녀 작가가 2년에 걸쳐 서로 연재를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오래된 책이었고, 익숙한 제목이었는데
.
네그로폰테 교수처럼 책을 좋아하지 않아 주변 사람들과

호흡하며, 시기 적절하게 읽지 못한다. 대신 인생의 어느 시점을 생각하며,
책을 읽어나가기 시작했을 때부터는 이미 덫에 걸린 듯 책을 접을 없었다
.
츠지 히토나리의 Blue 읽고나서 에쿠니 가오리의 Rosso 읽었다
.



이탈리아에 직접 가보지 않아서, 비가 올 때는 눅눅하고, 해가 반짝나는 건기 때는 얼마나

햇살이 청명하고 좋은지는 와 닿지 않았지만, 일본과 이탈리아를 왔다갔다하는 주인공의
시점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사람을 생각했다
.
기억력이 좋지 않은 나머지, 사람의 사진을 보기도 하고, 편지를 읽기도 했다
.
정말 보고 싶었나보다. 아니, 제대로 얘기하면 정말 보고 싶었었다. 보고 싶었던 마음이

깨져버린 나머지 아오이와 쥰세이처럼 서로에게 씻을 없는 상처를 주었는지도 모르겠다.적어도 상처를 기억들이 의도와, 사람의 의도와는 상관없는 일이었을 때는
더더욱 해결하기 어려운지 모르겠다.



남자인데 아오이의 마음이 이해된다. 하지만 사람이 쉽게 잊혀지지 않기 때문에, 다른 사람을쉽게 허락할 있을 같지도 않다. 아오이가 갖고 있는 보다, 내가 갖고 있는 벽이 훨씬 두꺼울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뒤에서 가면까지 쓰고, 안되면 가면 위에 석고를 발라서라도, 깨트릴 없는 옹졸한 자존심을 지키며, 나를 챙겨야 하는 것인가?

 

 

2007년 12월 14일 금요일

[Analog] "불편한 것이 가장 편한 것이다."

시기 니다. 화기, 넷, PMP 고, 에서 니다(클릭 오마이뉴스).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확인하고, 1년만에 감회를 느낍니다.
1
년에서 2년 우리나라의 IT시스템은 테스트 베드로의 실험장이 된다고들 하는데
,
우리가 활동 했던 시기 보다 딱 1년이 걸리는 것으로 보아 사실 같기도 합니다
.
이들보다 우리가 빠르다고 말하는 것 자체는 전혀 의미가 없지만

조금 더 다른 시도를 하고 있기에 도움 줄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자신감이

기사를 보고 생기네요..

2006
10월 추석기간에 팀프로젝트 미션으로 썼던 일기를 공개합니다
.



"
불편한 것이 가장 편한 것이다."

10
1일 부터 다음주 일요일까지 전화기를 거의 쓰지 않았다. 개인적으로 전화 때문에 불편하게 하는 경우가 많아서 전화를 잘 안받거나 하는 심술통지죠. 일이 바빠질때, 어떤 프로젝트를 진행할 때는 반드시 필요한 요물이긴 하지만요.. 한달 간 또는 일주일 간 혼자 여행을 하면 크게 전화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저를 걱정하는 것은 부모님, , 누나 현재의 여친 가까운 친구들 정도겠죠. 저보다 더 저를 걱정해 줘서 감사하긴 하죠.



10
2


집으로 내려가기 전에 핸드폰에 필요한 번호들을 다리어리로 옮겨 적었습니다. 가족들, 친구들, 대학교 선후배, 동기들, 군대 동기 및 선후임들, 학교 동아리, 소모임, 등등을 옮겨 적었더니 큰 포스트 잇으로 6장 정도 나오더군요.^^ 다들 아시겠지만 자신의 핸드폰에 저장은 되어 있으면서 전화를 하지 않는 사이는 의외로 많은 것 같더라구요. 그런 사람들은 옮겨 적으면서 빼거나 지웠습니다. 그리고 의식적으로 추석때 전화한번이라도 하고 싶은 사람들, 나에게 그런 관심을 보여주는 사람들을 옮겨 적었죠. 자신의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지만 정말 내사람이구나하는 생각이 번쩍 들었습니다.



10
4일 수요일 전화기 없어 - 전화기가 없으면 편하다
.

사실 전화하는 건 미국에 있는 여자친구를 제외하고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고향 집 인터넷은 끊어나서 자연스레 인터넷도 되지 않는다. 가족들과의 추석 행사와 친구들과의 친목 술자리에 가고플 뿐이다. 아마도 제대로 인류학 프로젝트를 몸소 진행하고 있는게 아닌가 싶다. 집전화를 하면 이상하게 다들 잘 받지 않는다. 자신의 핸드폰에 우리집 번호가 적혀있을리 만무하지만 적어도 어릴때 부터 사겨온 부랄 친구 녀석은 우리집 뒷번호인 6700을 알아보고 금새 전화한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안부차 집전화로 전화했는데 받지 않고 "누구세요??"로 다시 전화를 걸어온다. 그만큼 핸드폰은 나를 대신하는 듯 하다. 핸드폰 번호가 곧 나인것이다. 핸드폰은 수단임을 벗어나서 내 행세를 하고 있는 것 같다. 또 하나 신기한 점은 내가 전화를 안쓴다고 하면 화를 내는 친구들도 있다. 왜 화를 낼까?? 이해할 수 없다. 그리고 약속에 나가기 전 대충 전화하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몇시에 어디서 만나자고 약속을 신중히 하고, 나 스스로도 늦지 않으려고 미리 나가게 되는 좋은 점이 있다
.



10
6일 금요일(추석)  - 민족 대이동의 틈에 끼어


서울 생활은 이미 오래 했지만, 민족 대이동의 고통은 처음으로 맛 보았다. 7시간 동안 차를 탄것은 고통중에 고통이었다. ~~ 형이 운전하느라 고생해서 미안했다. 집에 내려갈 때 내가 운전해서 생색낸게 그래도 다행이었다. 안그랬음 이 시간에 내가 운전하고 있을 생각하니 무릎이 다시 아파오는 듯 했다. 다음 명절이 심히 걱정되긴 한다. 고향을 옮겨다 이쪽에다 가져다 놓고 싶은 심정이다. 많은 시간을 들여서 갔던만큼 정신없이 즐거웠던 시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아쉽기도 하다.



일기는 거의 초딩 수준이었지만 어쨌든 핸드폰을 내가 사용 안하는것에 대한 다양한 패턴돠 사람들의 시선을 읽을 수 있었다. 또한 핸드폰을 사용하는 아주 단순한 행동을 통해서 나 스스로 신중해지고, 새로운 점을 많이 깨닫게 되었다. 원래 전화하면 전화도 잘 안받는 나지만, 스스로 더 생활에 신중을 가하고 전화번호에 내가 묻히지 않게끔 노력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007년 12월 3일 월요일

12월 3일 - 조한과 어중간한 88만원 세대

12 3일 지식정보 사회 수업의 한장면을 옮겨 넣는다.
조한은 우리조의 발표를 듣고, 신중히 이야기 하기 시작한다

제대로된 질문들인가?
여러분이 하는 질문들이 제대로 보고 하는 질문인가?

전체적인 질문인 무엇인가?

구글은 한국에 맞는 서비스를 만들어야 한다.

한국에서만 적용되는 무엇인가를 만들어 보고자 한다. 왜 그렇게 해야하는지?
그러인해 얻은 Finding이 활용이 되는가?

구글이 한국에서 서비스를 성공할 수 있으려면 어떤 점을 도울 수 있는가?
적대적으로는 안된다. 생산적 비판을 할 수없다. 비판의 자격도 없다. 뭔가를 찾아보려는
태도를 가질때 뭔가 만들어진다.
잘해볼려면 이런식으로 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태도가 필요함. 우리가 고쳐야 함.

조한이 한판 싸움을 붙이기 시작함. 88만원 세대 공격 시작

구글이 원하는 것은 네이버가 열길 바람. 네이버는 아직 그럴 생각이 없음.
합병을 해서 잘 가는 방법도 있을 듯 사들일 생각이 없을 듯
좋다고 생각하면 살텐데, 안산다는 것. 그런 차원에서 생각을 해야함.

그런 방식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차원에서 이해될 수 있느냐는 것인가?
그들은 한번에 모두 잘릴 수 있지 않은가?

네이버는 내부적으로 Labor이라고 한다. 노동력을 통한 검색엔진
글로벌한 시각을 가지고

네이버의 인터페이스에 길들여짐.
네이버는 진화된 형태가 아님. 수동적으로 힘들게 만들어 놓은 독특한 검색 엔진인가?

게임...학습방식의 변화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하지 않은가? 학습에 대한 정의,지식에 대한 정의
를 시대적으로 정확히 한 상태에서 이해를 해야함.

비디오, 플래쉬, 시각적 효과를 구현하는 방법과 지식의 조화를 꿰할 수 있지 않을까.

텍스트로도 정리가 잘 되지 않는 이곳에서 길이 참으로 멀긴 멀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