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 7월 31일 금요일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14)


"죽자, 죽어야지, 좆같으 세상 살아서 뭐하나"란 생각이 들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지"열심히 멋지게 살자"라는 이상이 하루아침에 쨍그랑 깨져버렸다. 나보다 한살이 많던  oo라는 친구는 내 대학 동기이다.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던 그 녀석은 한국에 건너와 쉽지 않은 삶을 살고 있었다. 매일같이 옛날 얘기를 하면서 밤새 술을 먹었고, 뭔가 하나씩 빠트리고 살았던 것 같은 서로를 보면서 금새 친구가 되었다.

내 죽음에 관한 이야기에 그가 관여하게 된 것은 오토바이 사고로 oo는 죽었기 때문이다. 그는 여자친구를 뒤에 태우고, 헬맷을 그녀에게 씌워준 채  한강을 건너다가 차와 부딪혀 다리 아래로 떨어졌다. 신기하게도 그는 떨어진 이후 병원에 도착해서도 거의 눈을 뜨지 못했다고 했고, 그녀는 기적적으로 살았다고 한다. 나는 그 사건이 있을 당시 군복무 중이었다. 출퇴근을 하던 군인 시절이라, 부기장한테 전화로 사정을 설명하고 아버지 차를 몰고, 바로 서울로 향했다. 서울로 향해 앞뒤 안보고 달리면서, 죽기전에 얼굴이나 보자고 속으로 얘기했다. 서울에 다 도착했을 즈음 서울에는 비가내렸고, 천둥번개가 막 치고 있었다. 소설속에 나오는 구절 같지만 정말이지, 그가 가는 것을 슬퍼했는지 모르겠다. 용산에 있는 중앙대 병원에 도착해서 그를 찾았고, 그는 이름만 남아 있는 채, 담당자는 사망했다고 말했다. 장례식장에는 아무도 없었고, 빈소에는 덩그러니 "oo" 이름만 남아있었다.

새벽 3시가 넘게 도착해서 아침해가 뜨고 8시가 될 때까지 빈소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눈물이 나면 울고, 생각이 나면 멍하니 옛날 생각을 하곤 했다. 나보다 더 멋지게 사는 녀석을 보면서 나도 멋지게 살아야지 이렇게 생각하고 살았는데, 그게 하루아침에 쨍그랑 깨져버렸다. 이렇게 열심히 살아도, 멋지게 살아도 그냥 죽어버리면 그만이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때 나는 스스로 나를 한번 죽였다. 그리고 다시 태어난 것은 아니지만, 감각기관의 어느 부분이 크게 손상된것 처럼 그렇게 일부가 죽어버렸다. 행복의 감각기관 어딘가가 덩그러니 잘렸는지도 모른다.

내가 스스로를 한번 죽였다고 해서, 우울해지거나 슬퍼졌던 것은 아니다. 그냥 오히려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일년이 지나서, 누군가 나에게 죽음에 대해 발표할 수 있는 시간을 주었다. 그 발표는 oo의 죽음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어 줬고, 내가 사는 것에 대해서도 다시 정리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하이데거가 "삶은 곧 죽음이다."라고 얘기하는 것에 그가 실존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이라고 이해를 돕는 발표를 했지만, 나 스스로를 죽이고 나서 왜 기뻐졌는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간단히 얘기하면 내가 죽었어도, 그는 슬퍼하고 내 몫까지 열심히 살았을 거고, 나 또한 반대로 그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게 의무감이나 책임감은 아니었고, 그냥 나대로 삶을 살아가는 행복을 만끽하게 해주는 것 같다.

아마 oo가 아니었으면 그냥 그대로 개망나니처럼 살았을지도 모른다. 나를 죽이지도 못하고, 그냥 나 하나 살겠다고 계속 도망쳤을 것이다. 그가 죽어서인지, 결국 그를 통해 내가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지는 정확하지 않지만, 그가 죽은 것이 그렇게 슬프지는 않다.  좀 잠언집 같은 베스트셀러를 쓰는 미치앨봄이라는 사람이 쓴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 이란 책에 보면 이렇게 먼저 헤어진 친구들은 저 멀리서 내가 도착할 때 까지 기다려 주고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내가 죽을 때 까지는 그도 아직 죽지 못하는 것 처럼 말이다. 종교를 믿지 않아 사실 이런 이야기에 신뢰도 가지 않지만, 그냥 그의 죽음은 사실 그대로 나를 죽였고, 한편으로는 나를 더 도덕적이지 못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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